‘꽃사슴 낙종’과 ‘지게꾼 대령’

By | 2013/06/22

최근의 <한국일보>사태를 계기로 언론계에서 전설처럼 구전돼 오던 조간지 경쟁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1978년 <조선일보> 수습기자를 하면서 선배들에게 술자리 등에서 들은 일화들이다.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당시로서는 전적인 진실로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구담의 일부 디테일은 과장 또는 왜곡됐을 가능성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실제 일어났을 개연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게다가 두 가지 이야기 모두 내가 어릴 적에 신문 독자로서 읽었던 기억이 또렷이 남아있던 기사들이었다.

한국 신문들은 현재 <문화일보>를 제외하고 절대 다수가 조간지다. 그렇지만 1970년대에는 선두주자 <동아일보>를 필두로 대다수 신문이 석간지였고, 조간지는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정도였다. 따라서 <조선>과 <한국>의 기사 다툼은 치열했고, 특히 밤사이 큰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외신보도와 젊은 경찰 출입기자들이 맡은 사건보도와 화제성 기획기사의 특종 경쟁이 첨예했다. 1976년 9월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을 때 야근을 했던 한쪽 신문의 외신부 기자가 사망 기사를 빠뜨리고 난 뒤 낙종에 대한 충격과 심적 부담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결국 사표를 낸 일이 있었다고 한다.

deer deer2창경원 꽃사슴 (녹두 절단) 사건은 1961년 10월13일자 조간지 사회면의 머리를 장식했다. 간밤에 창경원 동물원의 수사슴 한 마리가 머리가 잘려 사라진 채 몸통만 발견됐다는 보도였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희대의 사건이자 엽기적인 소식이었다. 한때 흉악범의 대명사 고재봉의 일가족살인사건은 1963년에 일어났고, 한국 최초의 토막살인 사건인 ‘춘천호반 여인 살해사건’은 1965년이 돼서야 일어났다. 1961년이라면 참혹한 전쟁을 겪은 지 불과 10년도 안 지난 때였지만 범죄에 관한 한 ‘순진무구의 시대(Years of naivete)’였던 셈이다.

1961년 4월21일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 법관이었던 황윤석 판사가 자택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이 서울 장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부검 결과 위장에서 소량의 약물이 검출됐지만 사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아 온갖 추측과 풍문이 꼬리를 이었다. 그러나 한 달도 지나지 않아 5·16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이 사건은 세간의 관심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나는 그때 신문 독자가 될 만한 나이는 못되었지만 사회면에는 한자를 덜 쓰는 바람에 황 판사 변사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을 수 있었고, 당시의 사회적 경악을 생생히 기억한다.

5·16 직후 군은 공수부대를 동원, 1980년의 삼청교육대와 비슷한 ‘깡패소탕’ 작전에 나서 근 1만 명의 폭력배 혐의자를 검거했다. 이들 가운데 이정재 등 정치깡패 A급은 군사재판에 회부돼 사형선고 내지 10년 이상 징역형을 받았고 B·C급으로 분류되면 국토개발건설사업근로대(국토건설단)에 편입돼 제주도 한라산 횡단도로(5·16도로) 건설 등에 투입됐다. 이 때문에 사회가 긴장되고 범죄가 억제되던 와중에 누군가 대담하게 한밤중 창경원에 틈입해 꽃사슴 뿔을 얻기 위해 목을 잘라갔다는 것은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다.

어린 시절의 놀라운 일로만 각인돼 있던 창경원 꽃사슴 사건에 대한 뒷이야기를 들은 것은 사건 발생 17년이 지나 내가 신문사 수습기자가 된 다음이었다. 본래 창경궁이었던 창경원은 일제가 1909년 순종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의 전각을 헐어 동물원을 만들고는 ‘궁’에서 ‘원’으로 명칭도 바꾼 곳이다. 이후 창경원은 해마다 밤 벚꽃 놀이가 벌어지는 시민의 명소이자 국내 유일의 동물원과 식물원이 한데 있는 곳이기도 했다. 1960년대 경찰기자의 종로라인은 종로서-서울대병원-성북서-고려대가 주요 출입처였다. 그런데 봄철에는 창경원에 인파가 몰려들어 꼭 한 번씩 들러서 각종 사건이나 화제기사를 챙겨야 하는 곳이었다.

야근이 끝나고 휴식하는 자리에서 선배한테 들은 꽃사슴 사건의 비화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1960년 무렵 입사한 <조선일보> 기자 가운데 외근 기자가 영 소질과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1959년에 입사한 고 이규태 선생이 공채 2기였으니 아마 3기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3기 수습기자는 입사 직후 경찰기자로 종로서 기존 출입기자의 조수로 투입됐다. 약 한 달이 지난 후 그는 캡(시경출입기자가 경찰팀을 지휘하는 캡틴인데 줄여서 캡이라 한다)을 찾아와 읍소를 했다고 한다.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몸이 안 좋아 종로서와 서울대병원 등 출입처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는 하소연이었다.

종로경찰서는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신문사 기자들의 최초 출입처였고 기사 출처로서도 중시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신참기자가 종로서 출입을 못하겠다니 기자를 그만 두겠다는 말보다 더 어이가 없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캡은 꾹 참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예, 종로서하고 서울대병원은 선배가 이미 출입하고 있으니 저는 좀 조용한 곳에서 당분간 몸을 추슬렀으면 합니다.”

“그래? 그럼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예, 제가 생각해 보니 창경원을 따로 떼어서 맡겨주시면 제가 감당할 만 할 것 같습니다.”

“…. 정 그렇다면 좋아. 그럼 당분간 창경원만 맡도록 하지. 잘 해봐.”

이렇게 해서 이 수습기자는 언론사상 최초의 창경원 전담 취재기자가 됐다. 그리고 며칠 뒤 꽃사슴 사건이 터졌고, 문제의 기자는 어김없이 이 사건을 낙종했다는 것이다. 결국 얼마 뒤 이 기자는 언론계를 완전히 떠났다. 원래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다. 실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새로 들어온 기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꾸며낸 것인지는 잘 분간이 안 갔다. 하지만 만약 지어낸 이야기라면 대단히 공교롭고 그럴 사한 것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좀 더 흥미롭게 하기 위해 갖다 붙인 듯 들리는 후일담이 있었다. 경찰이 수사를 벌여 보니, 문제의 꽃사슴은 뿔을 잘라 녹용으로 팔아서 돈을 벌기 위해 창경원 수의사와 사육사 등이 공모한 내부 소행이었고 사건 발생 직후 특종을 한 타사 기자도 모의에 관련이 있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3년 뒤인 64년 백아무개(47)씨가 범인으로 체포됐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백씨는 “녹용을 먹고 힘을 기른 다음 코끼리를 타고 북진통일하려 했다”고 진술해 경찰을 당혹스럽게 했다고 한다. <중앙선데이> 기사에 따르면 오창영 전 창경원 동물부장은 “동물원에서 기르던 다람쥐 한 마리가 죽어도 시말서를 쓰던 시절이라 꽃사슴의 죽음은 대사건이었다”고 말했다.

deer3‘지게꾼 대령’은 1960년대 <한국일보> 일요판에 사회면 머리 상자기사로 실렸던 이야기다. 이 기사는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기억하기에는 60년대 전반에 본 내용이었다.

그 무렵 서울역전에는 지게꾼들이 대단히 많았다. 당시에는 리어카도 거의 없어서 지게가 주된 운반수단이었다. 또 실업자가 넘치던 시절이라 여자는 남의 집에 가서 식모로 더부살이하고 남자는 시골에서는 머슴살이를 하거나 도시에서는 지게꾼을 하는 것이 그나마 손쉬운 일자리였다. 도로망이 정비가 되지 않아 장거리는 주로 기차가 사람과 짐을 실어 날랐다.

‘지게꾼 대령’ 기사는 한국전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우고 육군 대령까지 진급했던 황아무개 씨가 50년대 말 제대를 하고 사회에 나왔다가 사기를 당해 재산을 다 날린 데 이어 아내와 이혼하고 자녀들과 헤어지는 등 패가망신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영락한 황 대령이 떠돌던 끝에 서울역 앞의 지게꾼이 됐다는 내용이었다.

전후 폐허와 상실의 시대를 실감하게 하는 인생유전의 대표적 스토리로 꼽힐 만한 기사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꺼린 황 대령은 얼굴을 가린 채 사진을 찍었고, 한사코 실명 공개를 거부했다. 수천 명 부하들을 호령했던 화려한 과거와 비참한 밑바닥 생활의 현재를 비교할 때 그가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예나 지금이나 신문사들은 이른바 가판을 본다. 각 신문사의 가판용 초판신문을 구해서 상대의 특종은 무엇이고, 우리가 빠뜨린 기사는 없는지 체크하는 것이다. 편집부와 문화·생활부 등 간지 부서는 가판을 볼 이유가 별로 없지만 뉴스 부서들은 가판을 당연히 보는 것이고 특히 사회부의 가판 읽기가 가장 경쟁적이고 치열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일보>의 ‘지게꾼 대령’은 일요판 화제기사였기 때문에 <조선일보> 사회부는 전날인 토요일 저녁 8시께 가판에서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사회부장은 이 기사를 보고 펄펄 뛰었다. “우리 남대문서 기자는 무얼 했길래 이렇게 좋은 기사거리를 놓쳤냐”고 캡에게 지청구를 퍼부었다. 캡은 당연히 남대문서 출입기자를 돌아보면서 “지금 당장 서울역에 가서, 황 대령을 찾아 기사내용을 확인하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여기에 남대문서 기자는 “저녁시간엔 지게꾼들이 하나도 없으니 내일 아침 일찍 가서 확인하겠습니다”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일요일은 기자들이 쉬는 날이었지만 기사를 물 먹은 지금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이튿날 새벽부터 서울역전에서 황 대령을 찾아 헤맨 남대문서 기자는 황 대령은커녕 황씨 성을 가진 지게꾼도 찾을 수 없었다. 지게꾼 여러 명을 붙잡고 물어봐도 영관급 장교를 지낸 지게꾼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회사에 나와 있는 캡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 사람은 없다는데요,… 다들 황 대령은 들어본 적도 없답니다.”

열을 받은 캡은 한 마디 했다. “낙종을 한 것이 모자라 이젠 기사 확인도 하나 못한다고? 한심하다, 한심해.” 그리고는 문제의 <한국일보> 기사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봤다. 기사 말미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라고 황 대령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표표히 떠나갔다.”

“앗, 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디론가 표표히 떠난 황 대령을 누군들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후로 이런 기사를 ‘완전범죄’ 기사라고 한다. 기사를 실컷 써놓고, 온갖 인용과 묘사를 다한 다음 기사의 주인공과 관련자가 죽거나 사라지거나 떠나버리면 독립적인 확인이 불가능할 것은 당연지사다.

‘지게꾼 대령’스토리를 응용한 것이 70∼80년대 예컨대 ‘세계 최장신자 방한’ 등의 기사들이다. 보통 기사가 많지 않은 공항 출입기자들이 정 급할 때 가령 “신장이 2미터 46센티미터로 세계에서 키가 가장 큰 케냐의 무하마드 킵상(28·남)씨가 일본으로 가는 길에 22일 한국을 잠시 방문했다. 킵상 씨는 한국이 크게 발전한 것에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오후 노스웨스트항공편으로 출국했다.”라고 송고를 하면 경쟁지 기자는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 것이다.

기자가 취재를 제대로 한 것이 아니라 적당히 꾸며 쓴 기사를 ‘작문 기사’라고 하는데 기사 전체를 지어서 쓴다면 아예 ‘소설가’가 되는 셈이다. 신문 매체의 경우 관련 전문가의 발언 등을 기자가 적당히 만들어 인용하는 일은 과거에 흔했다. 또 1990년대 <연합통신>의 모 베이징 특파원은 하도 여러 번 ‘덩샤오핑 사망’ 오보를 내는 바람에 소설가라는 별칭을 받기도 했다. <한겨레신문> 초기 어떤 기자는 타이완 신문 국장을 만나지도 않은 채 인터뷰 작문기사를 써서 게재하는 바람에 타이완정부의 항의를 받고 <한겨레> 창간 이후 첫 번째로 독자에게 사과하는 사고를 내도록 만들기도 했다.

라디오나 TV 등 방송매체는 없는 목소리나 얼굴을 조작해 넣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라디오는 단골 논평가를 만들어 내용을 불러준 다음 그대로 말하도록 시키고, TV도 출연자에게 논평할 내용을 미리 일러줘서 이른바 말을 입에다 떠먹이는 경우도 더러 있다. 1970년대 TBC 보도국의 아무개 기자는 라디오 리포트를 할 때마다 회사 근처의 구두 수선가게에 가서 주인에게 온갖 문제에 대한 코멘트를 따서 그를 한국 최다 출연의 라디오 논평가로 만들기도 했다.

어떤 언론이든 정치적 편향에 흘러 냉철한 머리(cool head)를 잃어버리면 종국에 가서는 ‘머리 없는 꽃사슴’같은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 또 어떤 신문이건 말 같지 않은 기사를 꾸며내다가는 언젠가 ‘지게꾼 황 대령’처럼 표표히 떠나는 신세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 이것은 특정 매체를 겨냥해서 하는 말이 전혀 아니다. 오직 독자들의 사랑과 동업자들의 존경을 받으려면 언론으로서 온당하고 합리적인 입장을 지키고, 매체로서 공정하고 정직한 보도를 해야 한다는 조촐한 소망의 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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